시선, 마음이 가고 이야기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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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중반을 돌진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작업하는, 영원한 현역, 조원강, 그가 늘
부럽다.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사실 적절치 않다. 유명세를 구가한 화가들의 대부분은 수명이
다하는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창작 욕구를 끝내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활화산처럼 토해
내고 발산했다. 조원강, 그 역시, 앞으로도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이토록 그가 집요하
고 활달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가히 생래적이다. 그동안 그는 고현학자
처럼 묵묵히 작업에 전념해 왔다. 외유내강 같은 것. 그러니까 그의 내면은 그가 조형할 세계
와 대면해서 치열하게 투쟁하지만, 부드럽고 기품있는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그의 성정
은 은연하다.
그의 몰입과 집중은 습관보다 오래됐다. 그러므로 생래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런데 이는, 돌이켜 보면, 우리가 풋풋한 청년임을 선포할 무렵, 그러니까 그가 본격적으
로 회화와 정면승부한 대학 때부터 비롯됐다. 그때 우리는 호기롭게 젊음을 만끽하거나 혹은
그저 탕진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해 치기어린 허언을 쏟아내고 까닭없이 눈물을 흘리며 엉거
주춤했다. 혈기 왕성하게 젊음을 맞이했으나 실상 내면은 허약했고 부실했다. 억압적 사회, 그
리고 슬프고 허약한 내면은 차라리 궁색했다. 비례해서 상처투성이의 시간이 계속됐다. 새롭
게 도약하기 위해 문턱을 넘어야 했으나 힘에 부쳐 어물쩍거리며 배회했다. 그 시절, 그는 그
리고 또 그리며 성장했다. 내가 경계에서 갈팡질팡할 때 그것조차 힘에 부쳐 엉거주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때, 그는 늘 멋지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진
행형일 것이다.
그의 그림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에 앞서 이토록 서두가 긴 것을 용서하시라. 우정에 대한 표
시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역시 이런 오랜 관계에서 비롯됐다고 감히
말씀드린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작품을 더욱 알게 되면, 그때는 그 소감을 글로 남기고 싶었
다. 그리고 감히 용기를 냈다. 얘기하자면 이렇다. 시간은 2년 전으로 소급한다. 마크 갤러리
에서 그의 그림이 전시(<시선과 명화>(5.23-6.22, 2019))됐다. 전시작은 그가 뉴욕에 상주하면
서 카메라로 포착한 다양한 풍경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카메라를 들고 사냥꾼
처럼 풍경을 포집했다. 집요하게 주변을 응시했고 갈증 난 짐승처럼 벌컥벌컥 흡수했다. 그가
카메라로 포착한, 그토록 많은 뉴욕의 거리 구석구석과 거대한 미술관 내부가 마침내 유화로
재현됐다. 건조하고 투명한 디지털은 따뜻한 유화로 생명을 얻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그
그림 앞에서 매우 아찔했다. 알 수 없는 지독한 소외와 대면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의 작품 속에는 거리를 걷는 수많은 인파뿐만 아니라 뉴욕의 미술관 관람객,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 가득한데 극도의 외로움이라니.
가장 먼저 가슴을 저미게 한 것은 그림에 재현된 풍경이, 이미 오래 전 과거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 없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해서 나와 만난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
는가. 미소를 잃지는 않았을까. 혹시 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을까. 한때는 뮤지엄과 뉴욕
거리를 산보했던 그들은 이렇게 정지된 상태로 프레임 안에 소환됐다. 부재하나 그들은 그때
현존했었다. 이른바 부재의 현존. 그 극도의 아이러니가 소외를 유발한 것이다. 이처럼 현재와
과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상황 속에 나는 위치한다. 그림 속 그림, 그러
니까 텍스트 속의 텍스트, 부재와 현존, 실재와 허구가 넘나드는 묘한 경험과 마주했다. 그림
속에 등장해서 시선을 주고받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는 관람객을 곁눈질하는 작품들.
더해서 작품과 작품이 서로를 마주보거나 빗겨 응시한다. 주고받는 시선만큼 수많은 이야기가
그 사이를 오고 간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묘한 외로움
을 환기한 것이다. 화가는 그때의 시간을 시각적으로 진공 포장하고 투명하게 제시했다. 부재
한 실존이 빚어낸 어떤 허무이다.
라캉 ((Jacques Lacan)의 응시를 언급하지 않아도 조원강의 그림은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
는 나’를 이토록 잘 보여준다. 특히 드가의 소녀상(그녀는 뒷모습이다)은 체감의 강도가 강하
다. 여러 시선의 복합적 교차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다. 조원강은 뉴욕 소재 미
술관에 전시된 드가의 소녀상(뒷모습)을 그렸다.
혹은 헤드셋으로 설명을 들으며 소녀상을 감상하는 두 남성에 주목한다(아마도 소녀는 두 남
성의 시선을 읽었거나 무심할 수 있다). 그리고 2019년 현재 마크 갤러리를 방문한 관객은,
소녀를 응시하는 두 남성의 시선을 엿본다. 혹은 마주한다. 이는 서사에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요컨대 실제 작가(조원강)와 내포 독자(두 남성) 그리고 실제 독자인 나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작가 조원강은, 과거 자신이 카메라로 찍은 풍경을, 내포 작가(카
메라의 눈)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재현된 그림은 내포 독자(두 남성)와 주고받는 시선
의 관계망에서 해석된다. 두 남성의 시선은 카메라로 자신들을 찍는 조원강을 엿본다. 그리고
2019년의 관람객은 두 남성(내포 독자)의 시선을 따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혹은 이와
무관하게 작품을 읽는다. 작가의 시선, 카메라의 눈(두 남성과 시선을 교환했을), 그리고 유화
를 보고 있는 현 관객의 시선이 상호 교차한다. 그림이 입체적인 이유는 이처럼 교차하는 시
선 때문이다. 시선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그때 이야기가 생성된다. 작가, 그리고 그림 속
두 남성 관객, 두 남성 관객과 실제 관객이 주고받는 시선, 그 사이를 이야기들이 미끄러진다.
그의 작품이 포스트모던 서사를 연상시키는 이유는 이 때문이리라.
화가가 드가의 소녀상을 관람하던 두 남성을 처음 카메라로 훔쳤을 때 오히려 두 남성이 화가
조원강을 훔쳐봤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소녀상이 그들을 매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후에
그 사진을 유화로 재현했다. 이때 불현 듯 궁금해진다. 왜 그는 수많은 사진 중에 이 사진을
그림의 소재로 선택했을까. 시간이 제법 흐른 후, 사진을 붓으로 해석하는 그 마음은 또 대체
무엇인가. 카메라의 눈으로 재현된 과거를 유화로 재구성할 때, 화가는 현재와 과거, 이곳과
저곳을 종횡무진한다. 시선들이 시공간을 허물고 만난다. 붓에 의해 생명을 얻은 대상은 실감
을 얻어 화가를 응시한다.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의 위계가 사라진다. 화가와 그림 속 인
물은 서로가 (보는) 주체이자 (보여지는) 대상이다. 따라서 서로 평등하게 시선을 주고 받는다.
조원강의 그림은 이를 무수히 반복한다. 과거와의 단절과 연계를 무한 반복한다. 그래서 시간
과 공간은 어쩔 수 없이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 수많은 틈을 생성한다. 틈과 틈 사이는 심
연보다 깊고 아득하다. 관객, 나는 그 안에 갇혔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시선, 그의 그림 속에
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시선, 역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작품의 시선, 그리고 그것을 바라
보는 나의 시선까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길을 잃거나 오히려 그 관계망 안에서 편안한 귀
속감을 느낄 수 있다.
조원강, 그가 영원한 현역으로 남아 주기를, 그래서 그의 그림을 늘 행복하게 관람할 수 있기
를, 소망한다.
조용훈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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