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단지
최인호(Choi Inho)
2017. 11. 11 ~ 2017. 12. 10
Open 11:00 ~ Close 18:00(월,화,수,목요일 휴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마을길 55-8
031-949-4408
신도림 2014년 겨울-61x72cm, Acrylic on Canvas, 2014
광화문-45x53cm, 패널 위에 옻칠, 2017
기도-116x91cm, Acrylic on Canvas, 재, 2017
나들이-91x91cm, Acrylic on Paper, 재, 2017
보안관 처럼-72x60cm, Acrylic on Panel, 재, 2017
최소의 실존에 비로소 부응하는 회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궁지로 몰았던 건 어른들이다.
인간은, 특히 어른 인간들은 자주 자신들의 미천한 경험에 전 존재를 의탁한 채,
자연의 미물들조차 쉽사리 알아차리는 만고의 진실을 부정할 만큼 어리석다.
어린 왕자는 그런 어른의 세계에 소속될 수 없는 인간형이다.
어린왕자는 자신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단계에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어른들의 담론이 아니라 붉은여우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인은 본성적으로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화가는 왜 아니겠는가? 경험의 지식을 넘어서는 길, 그 너머의 차원을 그리워하는 방식을 갈고 닦으며,
이제껏 알아 온 세계가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더 따르는 이들이다.
이런 운명적인 지위로 인해 그들은 현재의 권력을 탐하고, 기성화된 지식만을 신뢰하는 지배자들의 범주에 소속될 수 없으며,
다만 소외자요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배자, 주류지식, 유행하는 것들이 그것들 고유의 무지와 무감각에 의해
스스로를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도록 만들뿐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시인과 화가는 이러한 세계에서 가능한 자유와 해방이 ‘최소한의 삶’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영위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조기한 손>을 들고 귀가하는 최인호의 남자가 아마도 그들에 혈통적으로 가까운 친족(親族)일 개연성이 크다.
빈자의 밥상을 환기시키는 손에 들린 조기한 손이야말로 최소의 실존을 지시하는 표상이다.
서사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최인호의 세계는 ‘최소’의 규범을 위반하지 않는다.
그의 서사가 가진 것이 없는 빈자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동안,
절제의 미학이 그에 상응하는 마땅한 언어의 출처를 자처한다.
재미나 역설을 목적하는 패러디가 아니라면, 조기 한 손, 가벼운 주머니, 앙상한 인물을 시각화하기 위해
강렬한 원색과 풍요한 색감, 극적인 구도와 집요한 묘사의 동원을 생각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인호의 회화적 언어가 충분의 수준에 모자라는 듯한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이유다.
최인호는 분명히 덜 그림으로써만 가능한 어떤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색은 화려한 묘사를 위해 화학적으로 제조된 안료의 극적인 효과와 무관하다.
최인호는 안료로서 오히려 울타리 밖의 것들, 일테면 흙이나 연탄재를 더 선호한다.
안료를 개는 순간부터 모더니즘 회화의 신화는 기꺼이 버려진다.
붓질에는 아쉬움이나 망설임의 흔적이 완연하다.
마티에르는 오히려 소극적이다.(앵포르멜의 오트파트를 생각해보라)
이 노선은 인물들에서 묘사적인 성격의 동작을 덜어낼 때 비로소 명료해진다.
인물들의 정적인 자세, 동작의 결여는 신체적인 활기와 근육적 활력의 결핍과 결부된다.
부조리한 실존으로 얼룩진 빈자의 리얼리티를 성토하기에
그들의 표정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감정은 느슨하게 이완되어 있다.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부조리한 환경에 맞서 싸울 의사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전적으로 세상의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한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역설인 것은 바로 이 동작의 결핍, 낮은 채도, 이완된 뉘앙스가 저항의 고유한 무기체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실존의 낙오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가장 탁월한 실존의 보고자가 되는 역설이다.
덜 그림으로써 오히려 회화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역설, 덜 그림으로써 더 많은 의미의 통로가 되는 역설,
최소의 서사로 오히려 그 폭을 더욱 너르게 하는 역설… 일테면 최인호의 인물들은 희생자가 됨으로써
장 보드리야르가 그렇게 언급했던 '진정한 말일성도의 교도들‘, 또는 ‘묵시록의 주역’들 같아 보이는
매우 현대화된 종족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최인호의 인물들은 묵시록적이 아니라, 실존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야위고 무력하지만, 자신들의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고, 천천히 걷고, 덜 먹고 덜 소비하면서 잘 버티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묵시록의 주인공들, ‘자신을 멈추는 모든 장치가 망가져버린 것과도 같은,
점점 더 살찌는 비만한 사람’ 과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최인호의 회화는 회화의 그리기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 언어적 가능성, 치밀한 묘사, 구조적인 구성, 색과 마티에르와 톤의 기름진 조절력 같은,
유서깊은 언어학적 유산을 기꺼이 내려놓는다. 그리기 자체, 곧 언어가 주는 고유한 기름짐을 결핍시킴으로써만,
회화성의 모더니즘적인 전통의 진폭을 최소화함으로써만, 그 언어적 불구성, 회화적 미완료를 통해서만,
그가 매일의 삶을 사는 실존의 궤적을 정확하게 추적해내는 새로운 언어체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기에 덜 의존하는 그리기, 그리기를 넘어서는 실존적 그리기,
그것이 최인호의 회화가 감수하는 위험인 동시에 가능성인 셈이다.
꿈꾸는 식물
노란 방
작가노트 ㅣ 인간단지 이번전시 타이틀이다.
예민한 나이에 읽었던 선배들의 책중에 삼사십년이 지난 지금 삶을 꾸려나가는데
유효한, 아직도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몇몇 책들의 제목을 자주 빌려오곤 했다.
왜 나는 나아가지 못하는지, 아직도 나는 왜 20대 후반의 머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왜 나는 아직도 꿈꾸는 식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울 1964년 겨울, 인간단지에 집착하며 향수하고 있는지... ⓒ
상품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상품이 찜 리스트에 담겼습니다.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