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잇소리
2014.09.04~2014.10.05
(am11:00-pm6:00 / 매주 월요일 휴관)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마을길 55-8
(헤이리예술인마을 1652-191)
참여작가_김인수, 김시은
사잇소리_김시은
우리는 한낱 모기와도 충돌을 느낀다.
모기 한 마리가 날아다닌다.
모기는 인간이 뿜어대는 날숨과 따뜻한 피의 맥박을 통해 참을 수 없는 흡혈본능을 느낀다.
두근거리는 검푸른 줄기 위에 독을 주사한다. 뱉기 위한 주입이 아닌 뽑아내기 위한 뱉음이다.
독은 모기의 것이므로 인간과 섞이지 못하고, 붉은 종기를 만들어 그들의 거부감을 표현한다.
두 이종의 충돌은 애매한 현실의 행복과 슬픔을 대변하듯 고통과 가려움을 반복적으로 가져온다.
감정의 모기떼는 사계절을 영유한다.
인간은 하나의 육체를 가졌지만, 하나의 감정으로 살지 못한다.
하나의 껍질 속에서 무한한 감정을 느끼며 사는 고통은 여러 번의 변태를 통해 탈바꿈하는 곤충의 그것보다 더한 것 일지도 모른다.
한 내면과 또 다른 내면에 물려가며 마음의 종기들은 온전할 틈이 없이 가득하다.
상처는 분노와 희열이라는 양극의 감정이 만나 만들어내는 깊은 농(膿)으로 차있다.
오늘도 감정의 모기떼들은 주변을 맴돌아 다니며, 빨간 거부감을 쏘아대고 날아간다.
감정에 물리다.
그는 어린 시절 벌레와의 경험을 통해 혐오, 분노, 희열, 행복, 불안 등의 감정을 느꼈다.
이제 벌레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때의 감정들은 아직도 그의 뇌리와 몸속에 기억된 것 같다.
그렇다면 무수한 스멀거리는 감정을 몰고 온 벌레는 현실 속의 무혐의 피의자일 뿐이다.
언제고 그가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감정은 벌레사건의 이전부터 마음속 부화를 시작 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기억이 아닌 발견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하나의 몸속에서 개인으로 매 순간 부딪혀야만 하는 감정들과의 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콤한 숨바꼭질을 한다.
그의 지난 대표작중 ‘부끄러운 소녀’ 시리즈를 보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감정을 볼 수 있다.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딸기 속에 소녀의 피겨가 몸의 일정 부분이 파묻혀 있다.
소녀의 몸 어디에서도 감정충돌의 증거를 찾아볼 수는 없다. 온전한 부분만 볼 수 있고 나머지는 딸기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기를 인식하는 우리는 그 소녀의 몸에 일어나는 스멀거리는 감정들을 달콤새콤하다 느낄 것이다.
그것은 기막힌 눈속임과도 같다. 아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감정을 역으로 이용해 볼 수 없게 숨겨버린 기발한 묘수이다.
어느덧 술래가 되어버린 우리는 그의 그림 속 감정을 찾아 계속해서 헤매는 노마드 일뿐이다.
실종된 페르소나를 찾다.
최근 그의 신작들은 온통 물감의 돌기들로 가득한 피겨들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실루엣을 통해 무엇인지 짐작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감정 벌레 ‘시리즈는 감정의 실체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이다.
“그의 페르소나와 같은 피겨들이 물감 속에 감추어진다.” 라며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부끄러운 소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딸기 속의 실체가 이제야 드러난 것이 아닐까?
수많은 감정충돌의 결과와도 같은 돌기들이 전체를 감싸 안고 있는 자체가 실체의 전부일 수 있다.
지난 시간 감정의 숨바꼭질을 끝내고, 당당히 감정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실체의 결과물은 이제 집 앞의 길거리로 나왔다. 감정의 크기만큼이나 비대해졌다.
그래도 한때 그는 숨바꼭질하던 소녀였기에 공사장 천막을 앞에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불안감과 자신감, 양극의 표현들을 그림의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사잇소리를 내다.
누구나 이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있다면 사잇소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덧나는 소리도 없었을 테고, 그리고 그의 작품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갈등과 충돌이 그의 감정을 몰아가듯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괴로웠던 감정 하나, 즐거웠던 감정 하나가 덧나 어우러지며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곪아가던 우리의 마음도 아물어가며 여물어갈 것이다.
오히려 지난 벌레의 트라우마와 감정충돌들이 그림을 그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비록 그가 느끼는 감정들로 많은 고통이 있겠지만 모든 것이 해소 된다면…무엇으로 그림을 그려갈 수 있을까
감정의 ‘사잇그림’ 같은 김시은의 작품들은 대립으로 부딪치던 자아이며,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칡 나무(葛)와 등나무(燈)가 서로 어울려 하나로 표현될 때, 아름다운 ‘사잇그림’도 탄생한다.
*사잇소리: 두 말이 어울려 한 덩어리가 될 때에, 그 사이에 덧나는 소리.
김시은_스멀스멀 나를 덮어버리다_oil on canvas_61x91cm_2014
사잇소리_김인수
헛된 욕망은 냄새로 남아 흐른다.
비 오는 날 자유로 끝자락, 알 수 없는 매퀘한 냄새가 느껴진다.
맑은 날들을 수없이 지나쳐 다닐 때도 알 수 없었는데, 비 오는 날만 되면 견디기 힘든 악취가 코를 찌른다.
지난날 난꽃(蘭)과 영지(芝)의 향기로 가득했던 섬은 각종 쓰레기로 모여 산을 이루었고,
더는 올라갈 수 없는 바벨탑과 같은 욕심으로 가득 채워졌다.
오늘날 섬은 너른 공원과 잔디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를 향해 원망의 한을 내뿜는다.
쓰레기만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매시간 수많은 쓰레기들이 버려지고 있다.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기에 사라지지만, 쓰레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다.
그것은 가치가 증발한 것이다. 외형의 모습이 어떻든 내면의 감정이 소진되어 끝나는 서글픈 마지막이다.
유행과 멋에 따라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싫증과 권태로써 잊히는 티끌이 되었다.
물건은 자신의 물성을 변화하여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뀔 수 있지만, 한번 버려진 감정은 쉬이 재활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물건보다 먼저 그에 대한 생각과 애정, 그리고 추억을 버린다.
탐하는 마음을 찾아 나서다
그는 버려진 가구를 수집했다. 수집이라기보다는 주워 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때는 고풍스러웠던 의자와 침대 등등 온갖 폐품들을 찾아 모았다.
대량생산과 복제로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일명 ‘짝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가구들이다.
세상엔 앤틱 이라 불리며, 아직도 시간과 세월을 멈추며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가구들도 있다.
하지만 재개발 구역에서 각종 쓰레기와 함께하는 폐가구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의 터를 바꿔 떠난 그들의 주인들을 닮았다.
이렇게 그가 이곳저곳에서 채집과 같은 궁상스런 수집을 하는 이유는 작품의 재료를 모으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 있는 너와 나의 욕심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무엇을 버려도 탐하는 욕심은 버려지지 않는다.
인자한 탈을 쓴 사회는 가지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무엇 하나 없이 가는 것이 우리인데, 잠시의 소유가 무한하다며 착각을 일으킨다.
오로지 차지하고 싶은 그 욕(慾)이 무한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비슷한 사람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지만,철저한 각자의 인성을 파고들면 그 괴리감은 너무나 크다.
그러므로 욕망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목표를 새워나간다.
그려진 것이 아닌 복사된 것을, 조각한 것이 아닌 찍어낸 것을, 따라는 했으나 영혼이 없는 것을…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는 모든 물건을 우리는 너무나 갖고 싶어한다.
무엇을 채워도 탐하는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붉은 것은 더 붉게, 검은 것은 더 검게 하다.
지난 그의 작품들 중 지갑과 가방, 종교적 상징물들은 외, 내면적 명품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그가 진짜 명품으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허물의 명품을 복제했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더했을 뿐이다.
김인수는 색을 빼 중용을 만듦으로써 사회와 우리를 지적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표현방식은 일종의 ‘이열치열’ 방식이다.
욕구의 전율을 더 많이 태우고, 빛깔은 더욱 반짝거리며 화려하게 표현한다.
“설마, 내가 그렇게 큰 과시욕으로 가득한 마음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작품의 이미지를 증폭해 만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그 터무니없는 마음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빛의 색을 지닌 인간이 아니기에, 색의 겹이 겹쳐갈수록 검게… 더욱 어둡게 변해간다.
부나비 마지막 *사잇소리를 내다.
명품을 따라 만든 폐가구들에 눈을 돌린 그는 더 뜨겁고 차가운 극단적인 소재를 찾은 것이다.
복제된 것을 한 번 더 복제하고, 타오르는 욕망에 더 많은 헛된 기름을 부었다.
그만큼 우리와 사회의 허영이 더 하게 되어 그와 그의 작품을 첨예의 끝으로 몰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은 아름답다.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닌, 심미적인 안목을 멀게 할 정도로…
그의 역설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모순의 미를 느끼게 하며, 죽을 것을 알며 달려드는 부나비의 심정으로 무아지경에 빠뜨린다.
그렇게 사회와 그의 인식이, 그리고 우리의 인식이 어긋나 덧나는 순간 작품이 탄생한다.
작품은 영원하다. 아니, 적어도 우리의 삶보다는 길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욕망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사잇소리: 두 말이 어울려 한 덩어리가 될 때에, 그 사이에 덧나는 소리.
김인수_chair_urethane_50x60x11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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